[이 아침에] 무뎌진 양심 다시 세우기
어릴 때 외갓집에서 살다시피했던 나의 하루는 할머니의 하루와 같았다. 할머니 따라 부엌에 들어가고, 개울가로 향하는 할머니 뒤를 강아지처럼 쫓아다녔다. 찬물에 빨래를 해서 그런지 외할머니의 손마디는 울퉁불퉁했다. 하지만 생긴 모양과 달리 뭉툭하게 불거진 손마디는 아주 섬세했다. 투박한 손으로 닭의 목을 비틀 때는 무시무시했지만 할머니의 칼질에 뽑아지는 국수는 얇고 보드라웠다. 새우젓에 고춧가루를 달달 볶아 끓인 얼큰한 두부찌개도 어릴 적 어깨너머로 배운 할머니의 음식 솜씨다. 이따금 밀가루를 푼 걸쭉한 고추장찌개를 끓일 때면 할머니 생각이 난다. “무딘 칼에 손이 베이는 법이다.” 저녁밥을 지을 때쯤이면 숫돌에 칼을 정성스레 갈던 할머니의 말이 그때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냥저냥 무뎌진 칼로 단단한 홍당무를 썰다가 한 순간에 피부 깊숙이 들어오는 금속의 촉감을 느끼고는 그제야 칼을 미리 갈아 놓지 않았음을 후회한다. 꼭 뻘겋게 피가 솟아난 피부에 밴드를 감아야만 ‘무딘 칼에 손이 다친다’는 할머니의 말을 떠올렸다. 살다 보니 칼만 무뎌지는 게 아니었다. 한 두 칸씩 물러서다 보니 이젠 언제 소리를 질러야 할지, 아니 소리를 질러도 되는 건지 망설이며 판단력이 흐릿해졌다. 이러려고 작가가 된 게 아닌데, 마음껏 양심의 소리를 내지르려고 글을 쓰려고 했는데. 작가에게 양심의 칼이 무뎌졌다면 호흡하지 않는 식물인간이나 진배 없다. 고뇌의 불을 켜려하니 난감하다. 치장된 텍스트에서 가식이 넘쳐나도 추켜세우는 걸 미덕으로 여기다 보니 어떤 게 옳은 것인지 구분조차 모호해지고 말았다. 어쩌다 이렇게 감정이 둔해지고 흐릿한 판단력을 키우게 되었는지. 세상은 따지기 좋아하고 예민한 사람에게 길을 내주지 않는다. 오히려 적당히 타협을 권하고 은근히 타락의 줄에 서길 원한다. 그래야 자신들의 불의함이 위로를 받을 테니까. 그래도 굴절된 눈높이로 살아갈 수는 없다. 나의 단호함이 오히려 까탈스럽고 괴팍한 성격이라는 선입견을 낳는다고 하더라도 익숙한 것으로부터 돌아서야 한다. 과감하게. 이제 내 무뎌진 양심의 날을 날카롭게 세우려한다. 펜촉 끝으로 무질서를 평정하려면 생각이 둔해져서는 안 된다. 100% 정의롭지 못한 나지만 그것 때문에 1%의 양심을 덮을 수는 없다. 자본이 주인이 된 세상에서 당당할 수 있고 책 안 읽는 세상에서 소설가로 버티기 위해 영혼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불순물들을 제거해야만 한다. 주변에 사람이 없어 외로울 것이나 두려워할 일은 아니다. 작가의 독방은 오히려 자유다. 정작 내가 괴로워해야 할 일은 친구가 없는 게 아니라 세상에 격분하지 않는 평온함이고 정의의 감각을 잃어버린 무딘 감정이다. 혼돈의 세상에서 미래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나약하게 들리는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그것만이 작가라는 이름표를 달 수 있게 만들 테니까. 권소희 / 소설가이 아침에 양심 할머니 생각